• 출처: [중앙일보] 기사 본문 읽기
해리슨 포드가 주연한 영화 'Presumed Innocent'를 본 적이 있다. 그 영화에는 전화 자동 응답기에 남은 녹음 내용에서 수사 단서를 찾는 장면이 나온다. 녹음된 말은 불과 몇 마디였지만 수사관은 그 사람이 쿠바 출신으로 미국 동북부 뉴잉글랜드 지역의 학교를 다녔다고 추측한다. 이런 추측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지역에 따라 발음이 다른 것처럼 땅이 넓은 미국 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발음이 다르다.
하지만 한국이나 미국이나 발음이 달라도 알아듣는다. 심지어 하일씨나 미즈노씨같이 미국과 일본에서 와서 경상도.전라도 발음을 하더라도 알아듣는 데 문제가 없다. 그렇다고 그 분들의 한국어 발음이 좋은 것은 아니다.
발음이 정확하면 좋겠지만 한번 고착되면 고치는 게 쉽지 않다. 발음은 그 언어로 많이 대화하면 좋아지지만 책을 보거나 녹음 테이프를 듣는 것만으로는 좋아지는 효과가 미미하다.
발음은 영어 공부에서 중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우선 순위는 낮은 것 같다.
중요도가 높은 것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우리나라의 어린 학생들은 영어 단어는 알지만 말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단어가 모여 어구가 되고 어구가 모여 문장이 된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이 어구다. 문장 내에서 쪼갤 수 없는 의미의 단위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엄마 오늘 학교에서 오다가 서점에 들러 책 한 권을 샀어요"라는 말을 한다고 하자. 우리 말을 할 때 이 문장의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와 문법에 맞게 신경을 쓰면서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순서가 맞지 않아도 알아듣기 때문이다. "오늘 엄마 책 한 권을 서점에 들러 샀어요, 학교에서 오다가"라고 하는 식이다.
하지만 어구를 쪼개 순서를 바꿔보자. "권 한 들러 에 을 오늘 서점 오다가 에서 책."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의사 소통에 있어서 완전한 문장이 필요한 것은 아니고, 의미의 단위인 어구를 정확하게 말할 줄 알면 된다. "학교에서 오다가", "서점에 들러", "책 한 권을", "샀어요", "오늘", "엄마" 를 정확하고 즉시 말할 수 있으면 의사 소통이 잘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영어 교육에서도 짧은 어구를 말할 수 있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둘째로 중요한 것은 상황에 맞는 단어를 아는 것이다. 발음은 셋째에 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창열 하버드 박사
2005.11.01 16:38 입력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