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0월 30일 월요일

드라마 상도(商道)에 나타난 리더십

드라마 상도(商道)에 나타난 리더십

천안대학교 기독신학대학원 실천신학교수, 현대목회리더십연구소 소장 김덕수목사


모 방송사에서 월화 드라마로 방영하는 상도(商道)를 보며 사실 나는 조그만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최인호의 원작과 너무도 다르고, 소설 상도에 나오는 수많은 감동적인 메시지들도 보이지 않고, 그 잘짜여진 구성에 비해 드라마는 너무도 밋밋하고 구성이 단순하며 질질 끌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인호와 달리 극작가 나름대로의 재구성과 창작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려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대하자, 흥미도 조금 생길 뿐 아니라 나름대로 배울 것도 적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이 드라마를 그저 흥미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최근 (12월17일) 방영분을 기억해가며 드라마 속에 나타난 리더십의 원리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이 드라마 상도에 나타난 리더십 연구는 개성에 근거지를 둔 기업 그룹 송방 총수의 딸이며 대행수인 다녕의 다음과 같은 질문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상도를 지키면서는 만상과 경쟁할 수 없는가?"

이 질문은 같은 송방의 임원인 정치수가 경쟁사인 만상을 죽이기 위해 비도덕적인 방법을 쓰자 옆에서 보기에 답답한 마음에서 다녕이 던진 것이다.
이 질문에 정치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대체 상도가 뭐냐. 만상의 허점을 이용하여 이문을 남기는 것이 내 상도다. 아가씨의 소신과 내 소신이 다를 뿐. 내가 장사꾼의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돈을 벌지 못하는 장사꾼은 이미 장사꾼이 아니다."

이제 이 두 사람의 이 대화 속에서 우리는 상도가 아니라, 사역에 필요한 리더십과 목회의 도(道)에 대해 생각해보자.

대체 상도(商道)가 뭐냐?
목적만 달성하면 성공인가? 과연 기독교 리더십의 특징은 무엇인가?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도 성경적이고 하나님의 방법이어야 한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이것을 인정하지만, 위기의 상황 혹은 결단의 순간에도 그렇게 하는 지도자는 많지 않다. 어려움이 오면 그 위기를 넘기기 위해 그저 어떤 수단을 쓰든 원하는 결과와, 성과를 얻기위해 애쓰는 것이 범인의 모습이다.

상대의 허점을 이용하여 이문을 남기는 것이 내 상도라고 부르짖는 사람이 사실 적지않다. 다른 교회가, 다른 리더들이 어떻게 되든 그들의 허점, 그들이 실수한 것, 그들이 못하는 것을 이용해 우리 교회만 잘되면 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목사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교회의 흠을 잡아가며, 우리 교회로 그 사람들이 오도록 만들고 싶은 유혹 앞에서 자유로운 목사나 교인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상도인가라는 질문처럼 목회의 도는 무엇이란 말인가? 믿는대로 살고, 믿는대로 목회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장사꾼도 상도를 논한다면 목회자에게도 사역의 道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약 2:14에서 성경은 말한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당신의 소신과 내 소신이 다를 뿐...
우리는 목회를 하며 매우 민감한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이것이 나의 목회철학이라고 주장한다.
정치수가 "당신의 소신과 나의 소신이 다를 뿐"이라고 말하듯이, 당신의 목회철학과 나의 목회철학이 다를 뿐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며, 성경적 가치관이란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인가? 기독교적 지도자는 목회를 하든 기업을 경영하든 "이것은 내 소신의 문제다"라고 말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하시는지, 성경은 무엇이라고 하는지 물어야 한다. 내 소신대로 하는 사람은 내가 주인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뜻 대로 하는 사람들 즉 예수를 주(Lord)로 모시는 사람들이다. 그 차이를 생각해가며 목회 해야 한다.

돈을 벌지 못하는 장사꾼은 이미 장사꾼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장사꾼들이 이런 나의 소신이란 이름으로, 돈만 많이 벌면 되지 않느냐고 주장하는가! 또한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교인만 많이 모이면 되지 않냐고 주장하고 있는가! 심지어 아무리 멋진 소리를 해도, 교인이 안 모이는데 그게 무슨 목회냐는 말을 서슴치 않고 하기도 한다. 돈을 벌지 못하는 장사꾼은 이미 장사꾼이 아니란 말이 그럴 듯한 것처럼, 사람 못 모으는 목사는 이미 목사가 아니라는 말도 그럴듯 하게 들리지는 않는가?

나는 그렇게 못하지만 지방을 다녀 오며 몇 가구 살지 않는 동네에 교회를 개척해 놓고 평생 그들을 위해 목회하는 시골 목사님들을 보면 존경심에 고개가 수그러진다. 온 동네 사람 다 나와도 30 명도 안될 곳에서 목회하는 그 분들은 3천명 교회 목사보다 능력이 없는, 혹은 목사도 아닌 목사라고 누가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교인이 더 많이 모이는 교회의 목사님이 하는 얘기는 조그만 교회 목사님이 하는 얘기보다 항상 더 진리로 여겨진다. 거기에는 교인들도 편승해서 부추기고 있다. 이것은 정치수의 장사철학과 다름이 없는 것이지, 성경적 목회관도 성경적 교회관도 아니다. 돈을 벌지 못하는 장사꾼은 이미 장사꾼도 아니라는 식의 그럴듯하게 들리는 리더십은 성경적 리더십이 아니다. 절대로 그 비슷한 소리라도 하는 지도자는 교회 안에 없어야 한다.

확실한 이문이 눈에 보이는데...
정치수는 자신이 속한 송상을 위해 술수를 써서 임상옥이 있는 만상의 자금 줄을 묶고 망하게 한 후에도, 총수에게 인정받고자하는 개인적 야망으로 상단의 자금을 동원해 조기 등 제수용품을 매점한 후 매석하여 돈을 벌겠다고 한다. 그러자 다녕은 "포구에서 어물을 떼다 파는 것은 소규모 장사꾼이 하는 장사다. 송상처럼 큰 상단이 나설 장사가 못된다"고 외친다.그러나 정치수는 "확실한 이문이 눈에 보이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대꾸한다.

눈 앞의 이익을 위해 상도도, 소신도 확신있게 내던져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다녕의 지적처럼, 송상 전체의 명성과 명예는 상관 않는다. 당장 잘될 수만 있다면, 앞으로 어떻게 되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의식이 지배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적인 장사꾼(기업가)들은 비로소 깨달았다. 가장 중요한 자산은 명예요, 명성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들은 평판 (Reputation)을 중시하는 사업을 하고 있으며, 광고도 기업 이미지 향상을 위해 애쓰고 있다. 목회자이든 기독교 사업가이든, 눈 앞의 이익보다는 교회의, 그리고 기독교의, 또한 하나님 나라의 평판을 신경쓸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이는 하나님은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예를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사 48:9)"고 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믿음이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이며,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선진들은 이로써 증거를 얻은 자들(히11:2)"이기 때문이다.

경쟁이란 이름으로, 능력이란 이름으로...
상단(대그룹)이 가지고 있는 규모(size)의 파워를 이용하는 것이 잘못된 일인가? 그렇지 않다. 그러나 그 힘을 약자를 죽이는데 쓴다면 그것은 또 다른 얘기가 된다.
다녕이 "자금력을 앞세워 수많은 소규모 장사꾼들을 죽이는 것은 부도덕한 짓이다."고 항거하나, 정치수는 장사를 크게 하여 이윤을 많이 남겨 송상의 그룹 총수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야망에 눈이 어두워 이렇게 대답한다. "장사는 어차피 경쟁이다.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장사꾼은 물러날 수 밖에 없다."

일면 맞는 말이다. 현대는 경쟁 사회다. 어설픈 동정심이나 싸구려 감상에만 의존하다가는, 지구촌화된 이 세상에서는, 게다가 이런 치열한 경쟁사회에서는 어느 기업도 살아 남을 수 없다. 이제 경쟁력과 능력은 곧 생존을 가늠하는 열쇠다. 그러나 그 힘을 이용해 구멍가게들을, 약자를 죽여 가며 성공을 꿈꾸는 것은 다른 얘기다. 그래서 우리 지구촌교회는 전도한 후에 꼭 우리 교회 안나와도 되니 가까운 좋은교회 찾아서 출석 하시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다녕이 "하루 벌어서 하루를 연명하는 장사꾼들의 손목을 비틀어 이윤을 남긴다면 그건 상인이 아니라 화적이나 다름없소. 굶주려 산으로 올라간 화적들조차 지나가는 행객의 차림새를 보고 도적질을 하는데.. 장사꾼이란 자가 화적보다 못한 짓을 하겠다는 것이요?"라고 주장하듯 여기에 능력은 도덕성과 함께, 이웃을 사랑하는 공동체 정신과 함께 사용되어야 할 덕목이지, 자신만을 위해 사용되라고 주어진 선물이 아니다.

목회에서도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선물을 주셨을지라도 그것을 경쟁의 이름으로 진화론적 적자생존의 원리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비기독교적이요 반 하나님적인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옛 말에..
이런 경쟁에서 생존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선이 아니겠냐는 의식은 이미 하나의 가치관이요 신조요 믿음이다. 다녕의 항변에 대한 치수의 반응은 "옛 말에 땅바닥에 돈을 깔아 놓으면 허리를 굽히지 않을 사람이 없다했다. 내 앞에 돈을 깔아 놓으면 아무도 날 화적이라 욕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니 두고 보라."였다.

여기 "옛 말에..."라는 장로의 유전과 전통과 사회적 관념 곧 세속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예를 보라. 그는 "두고 보라"며 자신의 신념에 대한 확신을 명확히 표출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참된 성경적 진리에 근거하지 않은 확신은 한 사람을 결국 파멸로 이끌며, 주변의 여러 사람까지 다치게 한다.

치수의 가치관은 자신을 향해 사람들이 허리를 굽히게 된다면 더 할말이 없지 않겠느냐, 나는 그것으로 내 주장의 타당성을 증명하겠다는 것이다. 남들이 굽실거리는 것, 소위 성공이 내 주장의 정당성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치관의 전쟁이다. 그리고 가치관은 우리의 믿음의 표현이다.

우리는 이런 정치수를 욕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얼마나 많은 정치수들이 우리 가운데 즐비한지 모른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교회 주변에서 "당신이 무엇이 성경적이네 아니네 해봤자, 그래 나보다 목회 잘 했냐? 내 성경공부 그룹보다 네 그룹이 더 크냐? 그래 당신 교회가 우리 교회보다 더 크냐? 내 가르침이 어떻다고 말하지만, 두고 봐라. 다들 우리 교회에 와서 도와달라며, 결국 나에게 굽실거릴 것이다"는 류의 말을 하는 경우를 여러번 보았다.

나는 정치수를 이해하고자 한다.
그를 이해하려면 그의 과거를 알아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 그럼 정치수는 어떤 인물인가? 정치수는 가문있는 집안 사람이나 가난으로 인해 학문을 포기하고 상권 장악을 통해 성공하겠다고 결심한, 학문과 벼슬을 포기한 헌신이 있기 때문에 더 강력하게 나오는 것이다.
사농공상 개념으로 상인이 천대받던 그 시대에 상인의 길로 들어서고, 개성 송상이 의주 만상을 이길 것 같자 금같이 여겼던 양심도 내던지고 만상을 배신하고 나온 사람이다. 그 때 정치수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을 것이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는가? 그러나 더 이상 괄시도 가난도 받아들일 수 없기에 그는 상계에서의 성공을 위해 모든 걸 버린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수는 도덕도 문제가 아니며, 남을 짓밟더라도 성공하고 올라서면 된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의 과거를 이해하지만, 과거의 정황으로 현재가 용납되는 것은 아니다. 이 사실을 혼돈하지 말라. 상담할 때마다 우리가 종종 겪는 일인데, 그를 이해하는 것과 그가 하는 행동이 옳다는 것하고는 구별되어야 한다.

우리 목회자들도 자신들이 더 큰 의를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헌신한 사람들이기에 사실 더 무섭게 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한다. 더 크게 여겨지는 헌신은 더 큰 확신을, 그것은 아무도 논할 수 없는 확신으로 우리를 끌고가 더 이상 아무 말도 듣지 않는 옹고집이 되게 하기 쉽기 때문이다.

진실한 상도
반면에 여기 정치수의 상도에 대한 반대 개념인, 임상옥의 상도가 있다.
많은 돈을 손해 보면서도 장사꾼이 왜 그런 일을 하냐는 질문에 임상옥은 이렇게 대답한다. "저는 장사는 돈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비단, 이것이 사업에서만의 도인가? 목회의 도는 다른가? "큰 교회, 많은 업적보다는 지도자를 세우고 일꾼을 남기는 것이 목회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진정 리더십이 있는 목회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을 남기기 보다는 돈을, 건물을, 또한 업적을 남기고자 하는 목회자도 없다할 수 없으리라. 혹시 현재 그런 유혹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기 전에는 나에게는 목회의 도가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임상옥은 본래 이런 인격이 된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가 상계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않는 만상의 도방 (그룹 총수)인 홍득주의 리더십의 영향 때문이며 그의 멘토링 때문이었다.




임상옥을 키운 홍득주의 리더십, 그리고 그의 멘토링


그렇다면 홍득주의 리더십은 어떠했는가? 몇가지만 살펴보자.


원칙에 따른 징계
홍득주는 리더십 중요한 자질 중의 하나인 분명한 징계와 보상이 있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그룹 총수인 홍득주는 자신의 권한을 위임하여 임상옥에게 상단을 맡겨 떠나 보내며 이렇게 코칭을 해준다. "먼길 떠나 장사를 떠나다 보면 상도를 어기는 놈이 있기 마련이지. 이번 상단의 책임자는 임서기니까 그런 놈이 생기면 자네가 엄중히 징벌하게. 상단 책임자로서의 권위는 자네가 만드는 거니까 알아서 잘해!"
사실 모든 완벽한 기획과 실행 능력에도 불구하고 임상옥은 엄청난 손실을 보고 망하게 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이유는 상단 멤버 중의 한 사람이 상단의 계율을 어기고 적에게 은자 10냥에 정보를 팔아넘겼기 때문이었다.오늘날 21세기에서만이 아니라, 과거에도 사실 핵심은 물건 자체보다는 정보전이었던 것이다.

임상옥은 마음이 여리고 본성이 착한 자이나, 총수 홍득주의 멘토링을 기억하며 배신한 두철이를 멍석말이 한다. 가슴이 아프지만 참고 그를 매질하며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한다.

물론 그는 이런 엄한 징계를 한 후, 그를 내팽개친 것이 아니라 (실패에 대한 화풀이가 아니었다) 의사를 불러 잘 치료시키라고 하고 장독이 풀리도록 숙소에서 며칠 쉬게 배려를 한다.

이런 엄중하며 원칙에 따른 공정한 징계의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회개한 두철이가 만상의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그 기회를 살려 임상옥은 기사회생을 한다.


돌봄과 보상
홍득주는 자신의 삶을 돌보지 않고 수고하여 성과를 올린 계열사 직원들에게는 상급을, 몇 번의 기회를 줘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가차없는 좌천을 통해 다시 준비하게 한 후 제대로 하면 다시 불러들인다.
또한 상권을 장악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해 목을 조여 들어오는 송상의 공세로 사업 환경이 열악해지며 그 자신과회사(만상)도 어렵지만, 총수 홍득주는 가장 가까운 사람 (외동딸)을 보내 멀리 장사를 떠나 어려움 가운데 남아있는 상단의 가족들을 위해 쌀을 보낸다. 가족들은 감격하고 고마워 한다. 그것이 돌봄의 리더십이며 충성을 끌어내는 섬김의 리더십이다.


파격적인 인재 등용
홍득주는 배운 것은 없어도 사람 보는 눈과 파격적으로 보이는 등용 원칙을 실행할 수 있는 소신있는 사람이었다. 홍득주는 임상옥의 부친을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빚진 것도 있었지만, 절대로 개인적인 정으로 임상옥을 대하지 않고 공평무사하게 한다. 오히려 그를 엄히 책망하기도 하지만, 그가 발군의 실력을 발휘할 뿐 아니라 잠시 손실을 입혀도 그것이 확고한 소신과 전망에서 나온 것임을 알자 다른 사람들의 눈을 무서워하지 않고 본전 서기로 특채한다. 또한 맡긴 일에서 뛰어난 성과를 올리자 즉각 발탁 하여 파격적으로 승진시켜 그의 가능성과 능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낼 기회를 제공하는 등용의 귀재였다.

지도자로서의 성품
홍득주는 이런 리더십의 기술적 자질만 가진 것이 아니라 리더십의 초석이라 할 수 있는 올바른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다. 상단 운영이 어려울 때 조금만 뇌물을 주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고 주위에서 그런 유혹의 검은 손길이 다가왔으나 그는 평생 원칙에 어긋나는 일은 안해왔다며 뇌물을 거부하는 정직성을 보인다. 임직원들은 잠시 그의 원칙 중심적인 성품에 답답해하나, 결국 임상옥을 비롯한 그들이 평생 바르게 장사하게 한 것은 지도자가 보여준 삶의 모델 때문이었으며 총수 홍덕주의 올곧은 성품 때문이었다.

반면 송상 대방 (이순재 분)은 자식 다녕에게 가르친 도덕적 원칙과 다른 행동방식을 사업에서 보였고 요구했기 때문에 그 원칙대로 살려고 애쓰던 대행수 다녕은 갈등과 번민 속에서 고통받게 되며, 결국 정치수 같이 재능은 있으되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만 주변에 들끓게 된다. 목회에서도 우리 지도자들이 만상 총수와 송방 총수의 삶의 자세 중 어떤 자세, 즉 integrity (순전성)가 있는 삶을 사느냐 아니냐에 따라 우리 교회의 목회 문화는 천지 차이가 나게 될 것이다.

홍득주는 총수로서의 바쁜 일과 중에나, 어려움 중에도 술과 유흥으로 시간을 죽이기 보다는, 마당에 나가 직접 장작을 패며 땀흘리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하인들이나 할 일로 치부되는 일을 재벌 총수가 하며 그 땀흘림 속에서 노동과 일의 가치를 직접 경험하며 초심 (불교는 이것을 초심이라하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계2:4을 따라 그리스도와의 첫 사랑이라 부른다)을 잃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이는 지도자 였다.

지금까지 본 것처럼, 비록 상도는 한갖 드라마이며 비록 임상옥이 실재 인물이라도 그의 성공기와 주변인물의 상당수는 작가의 허구지만, 우리는 적지 않은 리더십의 원리를 이 드라마 속에서도 생생하게 배울 수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주의 종들이여, 그리고 교회 곳곳에서 직무를 맡은 평신도 지도자들이여 장사꾼의 상도만도 못한 사역의 道로 교회를 어지럽히지 말자. 잘못된 리더십으로 교회원들과 일군들을 힘들게 하지 말자. 리더 당신 한 사람의 성패가 수많은 교회원들을 웃게도 하고 울게도 하기 때문이다. 상도(商道)를 능가하는 성경적 목회의 도(道)로 사역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메리 크리스마스!

출처: http://kr.ks.yahoo.com/service/wiki_know/know_view.html?tnum=121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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