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2월 22일 목요일

최고의 교수들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최고의 교수들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우리는 성공적이라 평가받는 교수들에게서 어떤 배움을 얻을 수 있을까?
먼저 우리는 돈 필켈Don Finkel의 책 제목이기도 한 ‘입 다물고 가르치기teaching with your mouth shut’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이다. 가르치는 것이 단지 강의만이 아니라 학습을 돕고 장려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당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핀켈은 그런 제목을 붙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교수법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의 변화가 요구된다. 수많은 학자에게 교수법의 정의를 물어보면, 그들은 종종 ‘지식의 전달’을 논한다. 말하는 것이 곧 가르치는 것이 라는 말이다. 그렇게 믿으면 안심이 될 수도 있다. 교수가 완전한 통제권을 쥘 수 있기 때문이다. ‘교과내용을 얘기해줬으니 나는 가르칠 건 다 가르쳤다’는 식의 태도이다.
그러나 최고의 교수들의 교수법에서 지혜를 얻으려면 그와는 전혀 다른 모델, 진짜 학습이 이루어지는 교수법 모델을 수용해야 한다. 특히, 대부분의 학생들이 자신의 잠재적인 학습 능력을 깨달을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교수법을 익힌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 수도 있다. 또한 자기 자신조차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그러한 발상은 다소 벅차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충분히 시도해볼 가치가 있으며 성취 가능한 일이다.
어쩌면 가장 큰 장애는 편견과 우리의 경직된 사고일 것이다. 교육자로서의 자질은 타고나는 것이며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 말이다.
우리가 연구한 최고의 교수들은 최고의 학습 환경을 만들기 위해 어떠한 노력도 마다하지 않았다. 학생에게 다가가는 데 실패했을 때는, 그 실패에서조차 교훈을 얻고자 노력했다. 무엇보다, 지식 전달 모델이 아니라 학습 중심 모델을 채택했기 때문에, 그들은 교수로서 학생들의 학습 과정을 이해할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연히 교과내용을 효과적으로 설명하는 법에도 관심을 가지게 됐는데, 주로 다음과 같은 논의에 초점을 맞추었다.
나는 학습이 무엇을 뜻한다고 생각하는가? 어떤 방법으로 학습을 촉진할 것인가? 학습 발달(또는 퇴보)을 학생과 내가 최대한 정확하게 파악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나의 노력이 학습을 돕거나 혹시라도 해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여기에 캐롤 드웩Carol Dweck의 연구를 적용해 볼 수 있다. 그녀는 지능이 고정된 것이라 믿는 사람들은 종종 무력감을 경험하는 반면, 지능이 노력을 통해 발달 가능한 것이라 믿는 이들은 성공할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교수법이 일차적으로 지식 전달을 뜻한다고 믿는 교수들은, 교수로서의 성공이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개인적 특징에 달려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뛰어난 강의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 있는데, 저는 아닙니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 처럼.
그러나 그들과 달리 우리가 연구한 교수들은 가르치는 것을 학습을 촉진하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 그리고 학습의 성질과 과정을 더 충실히 이해하면 더 성공적인 학습 환경을 조정할 수 있다고 믿는다.
최고 교수의 전제조건 중 하나는 언제나 새로이 배울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꼭 교수법 테크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 대해 그리고 그들의 포부, 혼란, 오해, 무지에 대해서 배울 것들 말이다. 최고의 교수들에게서 배우려면 학습 의욕과 함께 어쩌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도 실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모든 학생에게 똑같이 영향을 주지는 못하겠지만, 각각의 학생에게서 그리고 인간의 학습이라는 전반적인 개념에서 분명 우리가 배울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두 번째로 큰 장애물은 아마도, 교수법이 단지 테크닉의 문제라고 극단적으로 단순화해 생각하는 태도일 것이다. 지식 전달 모델에 의존하는 교수라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최고의 교수법’을 효과적 학습 환경을 조성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교수에게는 그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으로 보인다. 최고의 교수법은 대개 지적인 창조와 교수법 테크닉, 두가지 모두를 포함한다.
렘브란트라는 세기의 화가가 존재한 것은, 그의 붓놀림 하나만이 아니라 그의 천재적인 통찰력 및 시각, 개성, 이해, 시대적 공감 또한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해당과목에서 학습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함과 더불어 그것을 개발하고 수용하는 최선의 방법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그저 적당한 절차만 꿰차고 있는 틀에 박힌 전문가가 아닌, 우리가 맞닥뜨릴 수 있는 새로운 것의 고안이 가능하거나 필요할 때를 인정하며 ‘최고의 교수법이 단 하나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는 융통성 있는 전문가가 필요하다.
최고 교수들의 통찰력과 교수법에서 지혜를 얻으려면, 우리는 맹신적으로 적용실 적용시킬 수 있는 정답–요령–만을 바라는 ‘수용적 인지자’의 수준을 초월해야만 한다.
존 섹스톤(John Sexton)은 2002년 뉴욕 대학에서 15대 총장취임 선서를 하면서, 21세기에는 새로운 타입의 교수가 필요함을 천명했다.
“우리는 ‘교수’라는 직함을 받아들이는 것의 의미를 재고해봐야 합니다.”
그는 이제 대학 교직원들이 ‘학습, 학문 그리고 가르침이라는 총체적인 사업’에 대한 공동체적 책임을 끌어안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처럼 새로운 타입의 교수는 꼭 필요하다. 20세기의 교육을 경직시켰던, ‘연구와 교육’이라는 전통적인 이분법적 관점에서 탈피하여,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교수진(연구)과 학습(교육) 양자의 학습, 나아가 한쪽의 학습이 다른 한 쪽의 학습에 이익을 주는 체계를 지향하는 ’학습하는 대학’으로 보아야 한다. ‘학습하는 대학’은 때로 교수들이 진행하는 연구에 학생들이 참여하어간 교수들과 학생들이 대학 수준의 환경에서 의미 있는 지적 교류에 참여할 수 있는 공동체를 창조한다는 것을 뜻한다. 다른 사람들의 학습을 촉진하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 자신도 더 높은 수준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다. 학습자들의 공동체를 설립하고 유지하겠다는 교수진의 헌신이기도 하다. 그 핵심에는 그 공동체와 그곳에서의 논의를 지속하겠다는 교수진과 학생들의 헌신의 약속이 있다.
교육과 연구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거부하고 교수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새로이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도덕적 차원이 내포되어 있다. 자신의 학습과 발전만을 중시하는 교수들의 이기심에 대한 경종이라며 학생들의 발달을 책임져야 할 윤리적 의무감에 대한 인정이라는 얘기다. 더불어 실질적인 면도 포함되어 있다. 즉, 한 세대의 성과를 다른 모든 세대의 진보와 견주는 학습적 공동체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인정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교수들에게 무조건 더 많이 그리고 더 효과적으로 가르치라고 주문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진정 대학과 교수직을 새로이 정의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먼저 인간의 학습에 대해 더 큰 이해가 필요함을 인정해야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학습과 교수법에 대한 연구 및 이론적 자료 모두 우리가 어떤 과목이나 교육적인 경험을 어떻게 계획해야 할지 말해줄 수 있다. 모든 학문은 그 분야에서 지식 있음이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한 열띤 인식론적 질문과, 사람이 사고하는 법을 어떻게 학습하는가에 대한 연구에서 짐작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우리가 최고의 교수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함으로써 그들에게서 배움을 얻을 수 있음을 뜻한다.
우리가 연구한 교수들 중 학습 이론에 대한 체계적인 탐구를 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들은 학생들과 함께 작업한 경험에서 통찰력을 얻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발전시킨 개념들은 사회심리학자나 인지심리학자, 교육인류학자, 사회학자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의 결론들을 그래도 반영하고 있다. 그렇다고 과학적이고 구체적인 자료들을 무시하고 통찰력만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해당 학문과 그 학문의 최고의 학습법을 모두 이해하는 새로운 타입의 교수를 창조하기 위해, 먼저 젊은 학자들을 발굴하고 기존의 학자들을 후원하는 방식부터 개조할 필요가 있다.
더들리 허쉬바흐 교수는, 모든 논문에서 의무적으로 한 장章에 걸쳐 해당 주제를 다른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다르도록 규정할 것을 제안했다. 그런가 하면 리 슐먼Lee Shulman은 각 학과가 교직원 신청자들에게 자신의 교수철학을 가지고 세미나를 열 것을 요구하라고 제안했다. 물론 현직 교수들에 대한 지원도 가능하다. 모든 단과대학 및 종합대학은 대학 학습을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학과나 기관, 즉 교수진이 교육 관련 이슈를 연구하고 그것의 의미를 탐구하며 그 연구의 결과를 다른 학과 동료들이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게 돕는 학술적인 단체를 설립할 수 있다.
그러한 기관에서 연구를 기반으로 하는 교수법 이니셔티브를 발족하여, 동료들과 연계하여 문제점들을 공략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어떤 학생 그룹(어떤 인류학적 기준으로 정의하건)은 왜 교수가 기대하는 수준의 학업을 성취하지 못하는지, 또는 모든 학생이 새로운 수준의 발달을 성취하게 하려면 어떻게 도와야 할지의 문제에 초점을 두고 연구할 수 있다. 또한 의문점을 선별하고, 기존의 의론을 탐구하며, 입증 가능한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적용시킬 프로그램을 만들며, 그 결과에 대한 체계적인 평가를 제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대학 학습의 체계화에 기여할 것이다.
그러한 기관들의 연구진(교수진)은 전통적 범위의 학문을 전공하면서 해당학문에서의 학습에 대한 개별화하고 특수화된 연구를 추진한 사람이거나 또는 학습과학을 전공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한 기관을 학술 단체로, 그리고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을 교수지으로 규정함으로써, 단과대학 및 종합대학들은 그들이 추진하는 사엊의 지적 성격을 표방하고 종신재직권에 대해 다른 대학에서 부과하는 것과 똑같이 수준 높은 기준을 적용할 수 있다. 그러한 움직임은 학계 최고의 지성인들을 끌어들이는 데 일조할 수 있으며, 또 해당기관에서 초청 교수로 가르치면서 그러한 쟁점을 고찰 하도록 각 분야의 진보적인 학자들을 고무할 수 있다. 벌써 몇몇 교육개발센터는 그러한 학과의 본보기로 떠올라 주목받고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고등 교육을 위한 자금은 연구 보조금에서 나왔다. 가장 성공적이라 자부하는 일류 대학들은 전부 어마어마한 보조금 액수로 명성을 얻은 기관들이다. 빠른 시간에 지적 성장을 이루고자 하는 욕심에, 우리는 2차대전 이후 가시적인 연구실적 도외시해왔다. 우리가 맹신해온 전통적 학습 평가 방법이 가장 재능 있는 잠재적 학자들을 제대로 알아보고 발굴하는 데 실제로 도움을 주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1990년대 시러큐스 대학Syracuse University은 각 대학 교수진 및 행정직원들을 대상으로, 교수직과 연구에 대해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두 차례에 걸처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다.
평균적으로, 교수부터 학과장, 학장, 교무처장, 총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이 가르치는 일과 연구가 그들에게 똑같이 중요하다고 했지만, 하나같이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가르치는 일을 더 중시한다고 믿었다. 교수들은 동료 교수들이 학과장들보다 교육의 책임을 더 중시하며, 또 학과장이 학장보다, 학장이 교무처장보다 더 중시한다는 식으로 생각했다. 반면 총장이나 교무처장, 학장들은 그들이 교수진보다 교육에 훨씬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고 믿었다.
이제 비밀은 밝혀졌다. 모든 이들이 교육의 책임 부분을 통감하며, 혹은 중요하다고 말하거나, 그것의 필요성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그 비밀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길 때이다.


출처 : 컨 베인 저 - 미국 최고의 교수들은 어떻게 가르치는가 what the best college teachers do

댓글 없음:

댓글 쓰기